충무공 장검
이 칼은 조선시대 중기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한산도 수 군통제영에 재직하고 있을 때 의기로
제작하여 정신적인 표상으로 삼은 검이다.
이 칼의 명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.
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三尺誓天
산과 강이 떨고 山河動色
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一揮掃蕩
산과 강을 피로 적신다. 血染山河
이렇듯이 조선에 침범한 왜구를 몰아내고자 하는 마음이 글 구절 구절마다 물씬 배어나 충무공의 정신을 엿보는 듯하다.
충무공께서 도검 장인인 태귀련과 이무생 을 불러 검을 제작하게 하였는데, 이는 장검의 슴베에 甲午 四月 日造 太貴連
李茂 生이 음각되어 있음을 보고 알 수 있다.
슴베에 장인을 음각하는 풍속은 일본식으로 일본의 이름난 가문에서는 가문의 문장과 도명을 새겼다.
조선에서는 대개 관에서 제작하였으므로 특별히 출처를 남기지 않았다.
을미년(1595) 7월 21일에는 "태귀련 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 양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보냈다"는 기사를
보아 예하 장수들에게 선물도 하고,'3) 본인도 벽에 세워 두고 결전의 다짐과 정신적 수양을 다짐했던 의기의 검으로 삼은 것이다.
또한 이 장인은 전형적인 한국 도검을 만드는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도파의 십자 매듭, 고동의 국화문, 도신의 혈구는 당 시대
일본도의 영향을 받았다.
특히 일본식 도신과 한국적인 도초의 상반된 모습이 매우 고무적이다.
도초를 보면 모란문 은입사초봉·연화당초문의 요대을 등 매우 전형적인 조선 유의 문양과 일본식의 검신을 합친 모습을 볼 수 있다.
도두 부분의 화문인 은입사 문양은 조선의 양식을 볼 수 있으며, 특히 초봉의 모란문은 부귀와 미래 지향적인 여명을 상징하고
길상적 의미와 상서로움의 상징으로서 조선 문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.
또한 이충무공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"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선가
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" 이렇 듯이 이 구절에 나오는, '긴 칼 옆에 차고'를 보면 충무공께서 당 시대 도검의 특징 을 뒤엎은
매우 커다란 장도를 제작하였고, 이는 민족을 수호하고자 하는 충무공의 마음을 검을 통하여 느끼게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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